본문 바로가기
비전경제 비전경제

수출은 날아가는데 일자리는 왜 줄었나…엇갈린 한국 경제의 두 얼굴

vik 읽는 시간 약 11분
image 119

한국 경제의 지표가 묘하게 엇갈리고 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수출은 강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지만 고용시장으로 눈을 돌리면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제조업과 건설업에서는 일자리가 줄었고 청년층 취업자 감소도 이어지고 있다. 경제의 외형은 좋아지고 있는데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이나 산업 현장에서 느끼는 온도는 그만큼 올라오지 못하는 모습이다.

수출이 늘면 기업이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하고, 자연스럽게 일자리도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최근 한국 경제에서는 이 오래된 공식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반도체가 끌어올린 한국 수출

최근 한국 경제에서 가장 강한 지표 가운데 하나는 수출이다. 특히 인공지능(AI) 투자 확대와 데이터센터 증설로 글로벌 반도체 수요가 늘면서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직접적인 수혜를 받고 있다.

반도체 수출 증가는 개별 기업의 실적 개선으로 끝나지 않는다. 생산과 설비투자가 늘어나면 소재·부품·장비 기업의 수주에도 영향을 줄 수 있고, 수출 증가를 통해 무역수지와 국내 경제성장에도 힘을 보탤 수 있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서는 반도체 호황이 경기 전체를 떠받치는 중요한 버팀목인 셈이다. 최근 경제지표에서 수출이 유독 강하게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수출이 이렇게 잘된다면 제조업 일자리도 함께 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수출과 고용, 숫자는 다르게 움직였다

고용시장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전체 취업자 수가 증가하더라도 어떤 산업에서 일자리가 만들어졌고 어떤 산업에서 사라졌는지를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최근 고용 흐름에서는 서비스업이 전체 취업자 증가를 이끄는 반면 제조업과 건설업에서는 상대적으로 부진한 모습이 나타났다. 특히 수출을 주도하고 있는 제조업의 고용 흐름이 수출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과거에는 수출이 증가하고 공장 가동률이 올라가면 생산 현장에 필요한 사람도 함께 늘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자동화가 빠르게 진행된 첨단 제조업에서는 생산과 고용의 관계가 예전과 달라지고 있다.

수출액이 크게 증가했다고 그만큼 많은 신규 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반도체 수출이 늘어도 고용은 비례하지 않는다

이 현상을 이해하려면 최근 수출을 이끄는 반도체 산업의 특성을 살펴봐야 한다. 반도체는 사람이 많이 투입되는 노동집약 산업보다 공장과 제조장비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자본집약 산업에 가깝다.

최첨단 반도체 공장에는 수많은 장비가 설치되고 상당수 생산공정이 자동화돼 있다. 기업이 수조원을 투자해 생산능력을 확대하더라도 생산량 증가율과 직원 증가율이 똑같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다.

제품 가격이 상승하면 상황은 더욱 극명해진다. 생산하는 물량과 직원 수에 큰 변화가 없어도 반도체 가격이 오르면 기업의 매출과 수출액은 빠르게 증가할 수 있다.

결국 반도체 수출 100% 증가가 반도체 일자리 100% 증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첨단 제조업의 비중이 커질수록 수출과 고용 사이의 관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람보다 설비’에 더 많은 돈이 들어간다

반도체 기업의 대규모 투자를 보면 이러한 특징이 더욱 잘 드러난다. 첨단 생산라인을 구축하려면 노광장비와 증착·식각장비를 비롯해 클린룸, 전력시설, 용수시설 등에 막대한 자금이 들어간다.

기업이 투자하는 수십조원이 모두 신규 직원의 임금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상당 부분은 공장과 제조장비, 연구개발과 생산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투입된다.

이런 투자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공장을 건설하고 장비를 공급하는 과정에서 건설·소재·장비·물류 등 다양한 산업에 새로운 수요가 발생할 수 있다.

다만 그 효과가 실제 고용시장 전체로 확산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기업의 투자 발표와 국민이 체감하는 일자리 증가는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

일자리가 늘어난 곳은 서비스업

반대로 최근 고용 증가를 이끄는 산업은 서비스업이다. 서비스업은 제조업보다 사람의 노동이 직접 필요한 분야가 많기 때문에 수요가 증가하면 고용도 함께 늘어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서비스업이라고 모두 같은 일자리는 아니다. 보건·복지처럼 고령화로 인력 수요가 증가하는 분야가 있는 반면 정보통신과 전문서비스처럼 새로운 산업 성장과 연결되는 분야도 있다.

도소매와 음식·숙박처럼 내수경기에 민감한 업종도 있다. 고용 형태와 근로시간, 임금 수준 역시 업종마다 큰 차이가 난다.

따라서 서비스업 취업자가 증가했다는 숫자만으로 고용시장이 좋아졌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몇 개의 일자리가 생겼느냐만큼 어떤 일자리가 생겼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청년들이 느끼는 취업시장은 더 차갑다

특히 청년층에서는 전체 고용지표와 체감 사이의 차이가 크게 나타날 수 있다. 전체 취업자가 증가하더라도 청년들이 원하는 직종과 기업에서 채용이 늘지 않는다면 취업준비생이 느끼는 상황은 전혀 다르다.

여기에는 청년 인구 감소라는 구조적인 변화뿐 아니라 기업의 경력직 선호와 수시채용 확대, 자동화와 산업구조 변화 등 다양한 요인이 작용한다. 대규모 정기공채보다 필요한 직무의 인력을 그때그때 채용하는 기업이 늘어나면서 취업시장에 진입하는 방식 자체도 달라졌다.

기업과 구직자 사이의 눈높이 차이도 문제다. 중소기업에서는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고 호소하지만 청년들은 원하는 수준의 임금과 근로조건을 갖춘 일자리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현상이 동시에 나타난다.

이를 흔히 일자리 미스매치라고 한다.

건설업 부진이 중요한 이유

고용시장에서 또 하나 살펴봐야 할 곳은 건설업이다. 건설업은 반도체처럼 수출을 주도하는 산업은 아니지만 국내 고용과 지역경제에는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아파트나 공장, 상업시설 하나를 건설하는 데는 건설사 직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전기와 설비, 인테리어, 건축자재, 운송 등 여러 업종이 하나의 현장에 연결된다.

건설경기가 위축되면 이러한 산업의 일감까지 함께 줄어들 수 있다. 특히 지역 중소업체와 현장 근로자가 받는 영향은 상대적으로 빠르게 나타날 수 있다.

반도체 수출이 아무리 크게 증가해도 고용 규모가 큰 건설업과 내수산업이 부진하다면 사람들이 느끼는 경기 회복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다.

“경제 좋아졌다는데 나는 왜 모르겠지”

경제지표와 체감경기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반도체 기업이 해외에서 더 많은 제품을 판매하면 국가 전체 수출액과 기업 실적, 경제성장률은 좋아질 수 있다.

하지만 반도체 기업이나 관련 협력업체에서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변화가 당장 소득 증가로 이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일하는 업종의 매출이 줄고 고용이 불안하다면 뉴스에서 경기 회복이라는 말을 들어도 현실과 다르게 느낄 수 있다.

서울과 지방의 체감경기가 다를 수도 있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근로자의 상황도 다르다. 제조업과 서비스업, 건설업 역시 같은 경제 안에서 서로 다른 경기 사이클을 경험한다.

한국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과 모든 국민이 그 성장을 동시에 체감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수출 호황이 다른 산업으로 퍼지는 과정

그렇다고 반도체 수출 증가가 일부 대기업에만 도움이 된다고 단정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대기업의 실적이 개선되고 설비투자가 확대되면 장비와 소재, 부품을 공급하는 협력업체의 주문도 늘어날 수 있다.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면 건설과 전력, 물류 등의 수요도 발생한다. 기업이 벌어들인 돈이 임금과 투자, 배당으로 다시 경제에 투입되면 소비 증가로 연결될 가능성도 있다.

문제는 속도와 범위다.

수출 증가의 효과가 몇몇 대기업을 넘어 중견·중소기업과 지역경제까지 얼마나 빠르고 넓게 퍼지느냐에 따라 실제 체감경기는 달라질 수 있다.

AI·자동화가 바꾸는 ‘좋은 일자리’

앞으로는 일자리의 숫자뿐 아니라 필요한 기술도 빠르게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AI와 자동화가 반복적인 업무를 대신하는 대신 반도체 설계와 소프트웨어, 데이터 분석, 제조장비 운영처럼 전문성을 요구하는 직무의 중요성은 커지고 있다.

문제는 기존 근로자가 새로운 직무로 바로 이동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자동화로 줄어드는 직무와 새롭게 생겨나는 직무에서 요구하는 능력이 다르면 일자리는 존재하지만 필요한 사람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구직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채용공고가 많더라도 자신이 가진 경험과 기술이 기업의 요구와 맞지 않는다면 실제 취업 기회는 제한적일 수 있다.

앞으로 고용정책에서도 단순히 일자리 숫자를 늘리는 것을 넘어 산업 변화에 맞는 교육과 직업 전환을 얼마나 빠르게 지원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과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대기업에서 번 돈, 중소기업까지 흘러가려면

한국 경제가 풀어야 할 또 다른 과제는 성장의 확산이다. 반도체와 AI처럼 경쟁력이 강한 산업에서 만들어진 성과가 협력업체와 지역경제, 가계소득으로 연결돼야 체감경기도 함께 개선될 수 있다.

대기업이 국내에서 설비투자를 확대하면 소재·장비업체에는 새로운 시장이 생긴다. 국내 중소기업이 글로벌 공급망에 참여해 기술력을 높이면 대기업 중심의 수출 증가가 산업 생태계 전체의 성장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커진다.

서비스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 제조업에서 줄어드는 고용을 서비스업이 흡수하더라도 새로 만들어지는 일자리의 임금과 생산성이 낮다면 가계가 체감하는 소득 개선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수출의 규모뿐 아니라 수출로 만들어진 부가가치가 국내 경제에서 어떻게 순환하는지가 중요해진다.

image 120

수출 다음에 봐야 할 숫자는 ‘고용’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수출 호황은 한국 경제에 분명 긍정적인 신호다. 글로벌 AI 시장이 확대되고 국내 기업의 경쟁력이 유지된다면 수출과 기업투자 측면에서 새로운 성장 기회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수출액이 증가했다고 경제의 모든 부분이 동시에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자동화된 첨단 제조업의 비중이 커지면서 생산과 수출이 증가해도 고용이 같은 속도로 늘어나지 않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

건설과 내수처럼 많은 사람이 일하는 산업의 상황도 함께 봐야 한다. 특히 청년층이 안정적인 일자리로 진입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는지는 장기적인 경제 활력과도 연결된다.

앞으로 한국 경제의 회복을 판단할 때 수출액과 기업 실적만 봐서는 충분하지 않다.

수출로 벌어들인 돈이 국내 투자로 얼마나 이어지는지, 협력업체의 매출은 실제로 증가하는지,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임금이 개선되는지를 함께 확인해야 한다.

수출은 한국 경제가 해외에서 얼마나 잘 벌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고용은 그 성과가 사람들의 생활까지 얼마나 가까이 도달했는지를 보여준다.

두 숫자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경기 회복’이라는 말도 비로소 더 많은 사람의 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

vik

vik
함께 보면 좋은 글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