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을 줄여야 살아남는다? 한국 석유화학이 설비를 없애는 이유

공장은 제조업의 가장 중요한 자산 가운데 하나다. 제품을 더 많이 만들려면 생산설비가 필요하고, 공장이 클수록 대량생산을 통해 비용을 낮출 수도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공장이 많고 생산능력이 클수록 기업의 경쟁력이 강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지금 한국 석유화학 업계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기업들이 막대한 돈을 들여 지은 설비를 합치고 일부 생산시설의 가동을 중단하고 있다. 충남 대산에서는 롯데케미칼에서 분할된 롯데대산석화와 HD현대케미칼의 통합법인 H&L어드밴스드가 9월 공식 출범했고, 향후 3년간 연간 110만 톤 규모의 나프타분해시설(NCC) 가동을 중단하기로 했다. 정부가 제시한 전체 NCC 감축 목표 270만~370만 톤의 약 30~40%에 해당하는 규모다.
멀쩡한 공장을 세워두는 것은 기업에도 큰 손실이다. 그런데도 설비를 줄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석유화학 산업을 흔들고 있는 공급과잉과 공장 가동률의 경제학에 있다.
석유화학의 출발점 NCC는 무엇을 만드는 곳일까
자동차 내장재부터 스마트폰 부품, 포장재, 합성섬유까지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제품에는 석유화학 소재가 들어간다. 이런 소재를 만드는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NCC다.
NCC는 나프타를 높은 온도에서 분해해 에틸렌과 프로필렌 같은 기초유분을 생산하는 시설이다. 여기서 만들어진 원료는 다시 폴리에틸렌(PE), 폴리프로필렌(PP) 같은 제품으로 가공되고 플라스틱과 자동차 부품, 전선, 포장재 등 다양한 산업으로 공급된다.
문제는 이런 대규모 설비가 한번 만들어지면 수요가 줄었다고 쉽게 없앨 수 없다는 데 있다. 공장을 지을 때 이미 막대한 자본이 들어가고, 설비를 유지하는 데도 인건비와 정비비 등 상당한 비용이 발생한다.
수요가 충분할 때는 오히려 장점이다. 많은 제품을 생산할수록 대규모 설비에 들어간 비용을 더 많은 제품에 나눠 부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조업에서 말하는 규모의 경제다.
하지만 이 구조는 시장에 물건이 너무 많아지는 순간 기업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바뀔 수 있다.
중국이 공장을 늘리자 한국 석유화학의 계산이 달라졌다
한국 석유화학 기업은 오랫동안 대규모 생산설비를 바탕으로 제품을 만들어 해외에 판매해왔다. 특히 가까운 중국은 한국 석유화학 제품의 중요한 시장이었다.
하지만 중국이 자체 석유화학 생산능력을 빠르게 늘리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한국에서 수입하던 제품을 중국 기업이 직접 생산할 수 있게 됐고, 중국 내수시장뿐 아니라 해외시장에서도 공급 경쟁이 치열해졌다.
수요보다 생산능력이 빠르게 늘어나면 시장에는 제품이 넘쳐난다. 기업이 가격을 마음대로 올리기 어려워지고 원료를 사서 제품을 만들어 판매했을 때 남는 마진도 줄어든다. 공장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더 이상 경쟁력이 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기업은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한다. 가격이 낮다고 생산을 계속 늘리면 시장에 제품이 더 많이 풀리면서 공급과잉이 심해질 수 있다. 반대로 생산량을 줄이면 비싼 공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다.
한국 석유화학 산업이 지금 맞닥뜨린 문제가 바로 이 지점이다.

공장을 덜 돌리면 왜 오히려 돈이 더 들까
공장 가동률은 생산설비를 얼마나 활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만들 수 있는 능력이 100인데 실제로 90을 생산한다면 설비를 상당히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석유화학처럼 대규모 장치가 필요한 산업에서는 가동률이 특히 중요하다. 공장을 덜 돌린다고 해서 설비 감가상각비와 유지비, 정비비 같은 비용까지 생산량에 맞춰 똑같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공장을 유지하는 데 연간 1,000억원의 고정비가 들어간다고 가정해보자. 100만 개의 제품을 만들면 제품 하나당 부담하는 고정비는 10만원이다. 그런데 생산량이 절반인 50만 개로 줄어들면 다른 조건이 같을 경우 제품 하나가 부담해야 하는 고정비는 20만원으로 커진다.
즉 수요가 부족한 상황에서 비슷한 공장 여러 개를 조금씩 돌리는 것보다 경쟁력이 높은 설비에 생산을 집중하고 비효율적인 설비를 줄이는 편이 전체 비용을 낮추는 데 유리할 수 있다.
대산에서 벌어지는 사업재편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정부는 올해 2월 HD현대오일뱅크·HD현대케미칼·롯데케미칼이 제출한 첫 석유화학 사업재편 계획을 승인했다. 이후 롯데대산석화와 HD현대케미칼의 통합법인이 출범했고, 롯데케미칼 대산 NCC 110만 톤의 가동을 중단하면서 원료 조달과 생산시설을 함께 운영하는 방향으로 구조를 바꾸고 있다.
단순히 공장 하나를 닫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남아 있는 생산설비의 효율을 높이고 원료부터 제품 생산까지 비용을 줄이면서, 수익성이 낮은 범용제품 의존도를 낮추려는 구조개편에 가깝다.
설비를 줄인다고 석유화학 위기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한국 석유화학의 구조개편은 대산에서 끝나지 않는다. 정부는 지난 7월 여천NCC·롯데케미칼·한화솔루션·DL케미칼이 참여하는 여수 지역 사업재편 계획도 승인했다. 기업들이 개별적으로 버티는 대신 생산설비와 사업을 재배치하는 움직임이 산업 전체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공장을 줄였다고 곧바로 수익성이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 석유화학 시장의 공급과잉이 얼마나 해소되는지, 중국의 생산능력이 어떻게 변하는지, 기업들이 범용제품 대신 더 높은 부가가치를 만들 수 있는 소재로 얼마나 빠르게 이동하는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앞으로 석유화학 산업을 볼 때는 단순히 공장을 몇 개 폐쇄했는지만 볼 필요는 없다. NCC 가동률과 제품 마진, 중국의 신규 생산능력, 기업의 고부가 소재 비중이 함께 움직이는지를 봐야 한다.
이번 구조개편에서 흥미로운 점은 제조업에서 언제나 ‘더 많이 만드는 것’이 정답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시장이 성장할 때는 큰 공장이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주지만, 공급이 수요를 넘어선 시장에서는 같은 설비가 높은 고정비를 떠안기는 부담으로 바뀔 수 있다.
한국 석유화학 기업들이 공장을 줄이는 것은 생산을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남아 있는 설비의 효율을 높이고 더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제품으로 이동하기 위한 선택에 가깝다. 결국 제조업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것은 공장의 숫자가 아니라, 시장이 원하는 만큼을 얼마나 낮은 비용으로 생산하고 얼마나 높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다.
v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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